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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 밝혀두건대 필자는 종교가 없다. 연기, 즉 인연법을 강조한 불교에 조금 이끌리기는 하지만, 믿고, 기복 하는 신앙활동과는 거리가 있다. 대저 사람의 일이란 사람이 주체가 되어 풀어나가고 매듭지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어떤 기이한 현상, 이적 따위가 가끔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과학적 사고를 넘어설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주사위를 여섯 번 던져 모두 6이 나올 때도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이 글의 목적은 오래전 읽었던 책을 바탕으로 기억을 복기하는 일이다. 필자 스스로 희미해진 기억을 부여잡고, 다시금 수많은 지구촌의 이웃들이 믿고 있는 세계종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는 작업일 뿐이다. 행여 인연이 닿아 이 글을 읽게 되는 독자가 있다면, 함께 성장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믿고 싶다. 

     

    이슬람교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교

    이슬람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자로 회교라 쓴다. 그러나 대체로 오해하는 것이 기독교와의 관계다. 마침 가까이서 하도 싸워대니, 오해할 수밖에 없을지도. 그렇게 갈등하고 있으나 이슬람과 기독교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 종교다. 두 종교 모두 아브라함계 유일신 종교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슬람은 알라(하나님)를 유일신으로 믿고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로 여긴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생한 종교다. 따라서 사막의 영향을 많이 받은 종교로, 거대한 사막의 모래처럼 모든 구성원들은 인종과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해야 한다는 의식을 발전시켰다. 또한 사막의 거대함은 인간에게 무능과 무지를 느끼게 해 신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슬람이란 단어는 복종, 순종을 의미한다. 무슬림은 '이슬람을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슬람의 예언자이자 창시자는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로, 흔히 무함마드라고 부른다.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태어났다. 무함마드는 마흔 살에 스스로 예언자라 선언하고 포교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곧 기득권인 메카 귀족층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622년 추종자들을 이끌고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를 히즈라라고 한다. 무함마드는 메디나를 통합한 후 메카를 여러 차례 공격했고 마침내 630년 메카를 점령하면서 아라비아반도에 하나의 통합국가를 만든다. 무함마드는 혈연에 바탕을 둔 공동체를 발전시켜 종교공동체를 건설했다. 이슬람의 경전은 꾸란(코란)이라고 부르며, 꾸란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받은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수니파와 시아파가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메카에 성지순례 중인 모습

     

    이슬람교 수니파

    이슬람교의 대표적인 종파로 전체 무슬림의 90%를 아우르는 주류 종파이다. 632년 무함마드 사후 무슬림들은 후계 문제를 놓고 대립하게 된다. 이 문제로 말미암아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게 되었다. 아랍 전통에서는 부족장이 죽었을 때 부족회의를 통해 후계자를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전통에 따라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의 아버지로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를 제1대 칼리프로 선출하였다.(칼리프는 예언자가 아니라, 예언자의 대리인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시 이슬람 공동체에서는 무하지룬(메카의 이주자, 곧 초기 추종자 그룹)과 안사르(메디나의 토착민으로 메카 추종자의 후배쯤 된다)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안사르가 이 결정을 반대한 것이다. 이들은 알리(1대 이맘으로, 무함마드의 딸 파티야의 남편이다. 즉 무함마드의 사위이다.)를 예언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로 임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하지룬 측에서는 단순히 알리를 향한 비난을 잠재우기 위한 요식행위를 안사르 측이 과대해석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렇게 나뉘어 아랍의 전통을 따르는 무하지룬은 수니파의 기원이 되고, 무함마드의 혈통을 옹립하려던 안사르는 시아파의 선조가 된다. 요약하자면, 수니파의 공동체가 뜻을 모아 대표자를 뽑아야 한다는 주장과 시아파의 무함마드의 혈통만이 이슬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립했다가 각기 독립된 종파로 갈라졌다는 것이다.

    수니파는 순나(Sunnah)를 추종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순나란 쿠란, 하디스(무함마드가 말하고, 행동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묵인한 내용을 기록한 책) 및 예언자와 정통 칼리프의 선례에 바탕을 둔다. 수니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인 순나를 따르는 자를 의미한다. 통상 정치적인 차이로 갈라진 시아파에 대항한 상대적 개념으로 정통파 혹은 주류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수적인 우위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이슬람 세계를 이끌어가는 주도 세력이 바로 이 수니파이다. 그래서 기실 이슬람의 역사는 수니파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정통 칼리프 시대 이후 우마이야조, 압바시야조, 오스만터키제국 모두 수니파 국가였다. 해서 수니파를 다수파, 시아파를 소수파라고도 부른다.

    이슬람교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교 시아파

    시아파는 칼리프의 자리를 알리의 가문에 돌려주자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제1대 이맘이자 제4대 칼리프인 알리는 661년 암살당한다.(이맘이란 아랍어로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알리의 암살 이후 정통 칼리프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시아파로서는 정치, 종교적 투쟁의 시작점일 뿐이었다. 알리의 장남 제2대 이맘 하산은 알리의 사망 이후 우마이야조의 무아위야에게 저항하다가 결국 메디나로 돌아갔다가 46세에 독살당하고 만다. 알리의 차남 제3대 이맘 후세인은 680년 이라크의 카르발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우마이야조 칼리프 야지드의 군대에 참패,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이 일은 시아파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종교적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이 사건은 시아파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고 곧 복수와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제3대 이맘 후세인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속죄하는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는 주장이 정론으로 자리 잡는다. 시아파들은 해마다 이맘 후세인의 순교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자신의 조상들이 야지드의 군대에 후세인을 넘긴 것을 속죄하는 것이다. 이 행사에서는 카르발라 전투에서 보여준 제3대 이맘 후세인의 용맹성과 적들의 잔혹함을 묘사한다.

    시아파는 수니파와 비교해 주요한 특징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첫째가 비교주의다. 시아파는 다수파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은 투쟁하는 소수파의 도덕적 우월성을 이성적으로 방어하는 정신적 자세다. 필시 부족회의를 통해 후계자를 선출하는 제도에 대한 반발일 터이다. 둘째, 이상주의다. 일반적으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다. 시아파는 이맘의 부재 시 모든 현세적 권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교리를 폐지하지 않고 있다. 혈통을 정통성으로 보는 시아파다운 교리라 하겠다. 셋째, 감정주의다. 죄를 사해주는 용매제로 고뇌와 슬픔을 찬양한다. 소수파로써 억압받아온 역사적 경험의 투영이라 여겨진다. 탄압받을수록 고뇌와 슬픔은 깊어질 것이다. 그 속에 죄사함이 있다는 이론은 믿음을 버릴 수 없는 근거로 작용한다.

    시아파는 예언자 사후 후계자를 둘러싼 정치 논쟁의 한가운데서 출발하여 점차 교리와 신학을 발전시키는 단계로 나아갔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 자손들의 이맘 계승권을 믿는 정치단체에서 종파 이론으로 변화하였고 독자적인 종교사상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늘 박해 받는 소수파의 입장에 있게 됨으로써 내향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배타성으로 무장해 완고하게 저항하는 기질을 갖게 되었다.

     

    이슬람교 수니파와 시아파

    수니파와 시아파

    수니파의 종주국은 사우디아라비아라 할 만하고, 시아파의 맹주는 이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종파의 구도는 다른 이슬람권 국가와 이란 사이에 불화로 종종 드러나는 것 같지만 실제 속사정은 이보다 좀 더 복잡하다. 주로 수니파 국가들의 민족은 정통 아랍계 셈족인 반면, 이란은 페르시아계로 인도-유럽어족이다. 이런 민족적인 차이 또한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결정적인 반목의 주원인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와의 관계와 석유패권에 있다. 이란은 호메이니의 집권 이후 중동의 대표적인 반미, 반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났고, 이는 친서방을 표방하는 여러 다른 이슬람권 나라와 반목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앞서 살펴본 시아파의 특성도 이런 변화에 일조한 면이 없지않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런 갈등의 상징적인 사태가 바로 이란-이라크전쟁이었다. 80년대 티브에서 뉴스가 시작할 때면 늘 이 전쟁의 장면과 사태추이가 한 꼭지씩은 다루어졌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기회가 된다면 다른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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